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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비단과 금은보화가 넘쳐나던, 하지만 모래바람과 전쟁 속에서 한낱 신기루가 되어버린 실크로드. 21세기 현재 그 길은 역사의 저편에 묻혔다. 하지만 그 신비함만은 여전하여 지금도 세계의 많은 여행가를 끌어들이고 있다. 나 역시 그곳이 궁금하여 짧게나마 우즈베크에 다녀왔었고. 그런데 이 곳을 압도적으로 깊이 파고든 자가 있으니, 시베리아를 샅샅이 파헤쳤던 여행작가, 콜린 더브런이다.



  아무래도 '시베리아'에 이어 읽었기에 자연스레 전작과 비교하게 됐다. 두 여행기의 가장 큰 공통점은 살아있는 묘사와 생생한 대화를 바탕으로 시대상을 온전히 담아냈다는 것이다. 고로 글에 생동감이 느껴진다. 두 권을 연달아 읽으니 짧은 기간에 시베리아와 실크로드를 이어서 다녀온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저자의 해박한 지식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그가 정말 존경스럽고, 본받고 싶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아무래도 현지 분위기겠지. 실크로드가 여러 나라에 걸쳐있고 그 중 상당수가 불안정한 곳이다 보니[각주:1] 시베리아 여행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시베리아가 동토 속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그림이라면 실크로드는 여러 조각난 덩어리들이 모래언덕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말라가는 그림이었다. 시베리아는 최소한의 역사 줄기가 있었지만, 실크로드는 아예 단절되어 돌아볼 곳이 없었고, 그래서 막막했다. 수많은 세력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고, 정복자는 그때마다 피정복자의 흔적을 지웠다. 현재도 민족 간의 반목[각주:2]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뿌리 없이 방황 중이었다. 여행기 속의 비단길은 그런 곳이었다. 그 속에서 발전이 막히니 사람들의 의식 수준까지 상대적으로 뒤처진 건 덤.


  그래서일까, 이 책의 초반부를 읽을 땐 '시베리아'를 처음 읽을 때보다도 훨씬 책장이 더디게 넘어갔다.  시베리아를 읽을 때야 적응의 문제였지만, 이 책의 타클라마칸 사막 부분에선 숨이 턱턱 막혔다. 특유의 황량함과 막막함 때문에.. 위구르 사람들이 괜히 여길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다. 결국 글을 읽는 나까지 방향을 잃고 헤맸다. 오죽하면 저자의 글의 가독성이 떨어지고 난해하다는 생각까지 했을까. 실제로 전혀 안 그런데... 그만큼 여기서 깨나 고생했다. 나중에 저자가 파미르 고원 너머 키르기즈로 향할 때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어떤 페이지.


  반면 우즈베크(사마르칸트, 부하라)에선 마치 고속도로 달리듯 책장을 넘겼다. 우즈베크는 무려 재작년에 다녀온 곳이라[각주:3]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지. 오로지 텍스트만으로 풍경을 그리는 거랑[각주:4] 실제로 본 풍경을 다시 떠올리는 건 차이가 크니까. 해당 부분을 읽으며 내가 봤던 사마르칸트, 부하라 풍경과 2003년의 풍경을 비교했다.특히 사마르칸트는 그 차이가 컸다. 심지어 '이분은 이렇게 생각하셨구나..' 하며 감상 공유까지.. 문득 재작년에 우즈베크에 갔을 때가 그리웠다.


  그렇게 아무다리야강을 건넜고, 책장을 더욱더 빠르게 넘겼다. 신나서? 아니, 답답해서!! 꿈도 희망도 없어서!! 내 눈에 아프간은 그저 식물인간 상태의 피폐한 나라였다. 길가에 탱크 잔해가 돌아다니고 사막 저편에 한 종족이 떼거리로 파묻혔다. 학살당해서. 오죽하면 수구적이기로 유명한 이란의 마슈하드가 트인 느낌이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이슬람을 굳건히 믿으며 미래는 우리 편이라 말한다. 그 말이 더욱 내 울화통이 치밀어오르게 했다. 그 후 십수년간 여기가 어땠는지 알고 있으니까. 대체 믿음이 뭐길래...


  이란 부분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모두가 극도로 억압되어 있었다. 대체 믿음이 뭐길래...(2) '바른 마음'을 읽고나서 종교에 대한 마인드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이런 모습은 아직도 거북하다. 대체 그게 뭐길래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삐뚤어진건지..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소통한다. TV든 인터넷이든 끊임없이 서방 세상을 접했으며, 그렇기에 희망의 끄나풀이라도 움켜쥐었다. 이 모든 걸 작가는 그저 담담히, 생생히 담아낼 뿐이었다.


  워낙 산전수전 겪으며 다양한 경험을 해서일까, 저자는 안타키아(안티오크)에서 마치 여행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완독하고 감상문을 쓰는 지금도 탱크가 널브러진 사막길을 헤쳐나가고, 키르기즈 고원의 천막에서 별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진한 여운이 남았다. 이 농약 같은 모랫길 같으니라고...


저자의 여행 경로. 그는 2003년에서 2004년까지 총 240일간 중국 시안에서 터키 안타키아(안티오크)까지 총 12,000km를 여행했다. 한-회-티베트-위구르-키르기즈-우즈베크-아프간(타지크, 파슈툰)-페르시안-쿠르트-튀르크(아랍) 민족 사이를 누볐다.


  많은 사람이 여행기를 찾는 덴 크게 사전 조사와 대리만족, 그리고 회상의 세 가지 목적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근데 이 책은 그 3가지 중 어느 목적이라도 충족시킬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내가 이 책을 보며 그렇게 느꼈으니까. 우즈베크 부분에선 2년 전의 기억을 되살렸고, 아프간 지방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여러 소도시는 이 글로 대리만족했으며,[각주:5] 나머지 부분은 그 어느 책보다도 알차게 조사 아닌 조사를 했다.[각주:6] 그야말로 "현대 여행기록의 빛나는 모범"이라 할 수 있겠다. 비록 페이지를 넘기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꾹 참고 읽다 보면 그만큼 많은 게 돌아온다. 그러니 실크로드에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작가님 덕분에 좋은 여행 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 당장 이 여행도 아프간 전쟁 때문에 2004년 같은 계절에 다시 가서 여행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위구르족과 회족의 한족에 대한 반감,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여러 일들.. [본문으로]
  3. 심지어 요즘 부하라 여행기를 한창 포스팅하는 중이다!! [본문으로]
  4. 때때로 책 읽다 말고 구글 지도로 도시 사진들을 뒤적였다. [본문으로]
  5. 이 두 곳은 도저히 못가겠다. [본문으로]
  6. 단순한 교통정보보다도 역사와 사람들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진짜 조사라 생각한다. 이 부분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여행의 깊이가 달라지니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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